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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문학, 사유

시선의 높이

by 나달리 2022. 2. 24.

시선의 높이

 

 

시를 이해하는 사람과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는 세계를 보는 통찰의 깊이와 높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언어를 지배하는 시인과 언어를 단지 사용할 뿐인 보통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시선의 높이, 그 차이는 매우 클 수밖에 없다.

 

비유를 바꿔보자.

 

숫자를 다룰 수 있는 사람과 다루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수'라는 것은 원래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세계를 분류하고 또 분류한 그것들을 다루는 도구로 개발된 하나의 관념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분류를 할까? 이것은 자신의 뜻대로 세계를 재편성, 즉 디자인하는 가장 원초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분류해서 재편성하고 디자인함으로써 인간은 세계를 자신의 의도대로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다.

 

'2'라는 숫자가 있다. '2'는 매우 포괄적인 분류의 한 형태이다.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이 '2'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중국과 미국이 '2'가 되기도 한다. 지구와 달을 '2'라 하기도 하고, 이슬 두 방울이 '2'가 되기도 한다. 이 생각과 저 생각을 합해서 '2'가지 생각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네 사람을 묶은 두 집단을 '2'라 하기도 한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한 형태의 '둘'이 '2'라는 숫자 하나에 모이거나, 포함되거나, 압축되거나, 추상화된다.

 

이렇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양한 특정 경우를 숫자 하나로 지칭하는 일은 매우 경제적이다. 경제적이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에 힘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을 활용할 줄 알게 되면,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수를 사용하는 일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던 그 이전의 시대와 비교한다면, '수의 사용'이란 인간이 전략적으로 엄청나게 진보했음을 의미한다. 자신이 원하는 구도, 자기 전략에 맞게 세계를 구분하고 장악하고 지배할 수 있는 특정한 유형의 구조를 만들어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과 수를 사용하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갖는 것이 현실적인 지배력까지 보장해주는 이유는 세계를 그만큼 더 넓고 높은 데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성의 높이를 철학의 단계까지 끌어올린 사람은 그러지 못한 사람보다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왜 '철학적'이어야 하는지 수학과 비교해서 두루뭉술하게 설명해보았다. 다만, '철학적'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철학 수입국으로서의 우리는 자칫 철학서에 들어 있는 외국 철학자들의 이론을 숙지하는 것을 철학적 시선을 갖거나 발휘하는 일로 착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철학적 지식을 갖는 일과 철학적 시선을 발휘하는 일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철학적인 지식에 익숙해지는 단계를 넘어서서 스스로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지성이 한 발짝 한 발짝 상승해서 더 이상 오르지 않아도 되는 그곳, 거기에 철학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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