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를 위한 사회
공리주의자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곧 정의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한다면 그것이 곧 선이고 정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에게는 이익이 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줄어든다면 기꺼이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구가 100명인 나라가 있다고하자. 어떤 제도가 1명에게는 100의 쾌락을 주고, 나머지 99명에게는 각각 1의 고통을 준다면, 그 제도를 선택해야 할까?
공리주의자들은 쾌락과 고통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합쳐서 쾌락이 100이고 고통이 99이면 결국 쾌락이 고통보다 1이 더 많으니 정의에 걸맞다고 생각하고 그 제도를 선택할 것이다.
반면 20세기 미국의 정치철학자이자 도덕 철학자인 '존 롤스'는 다음과 같은 '정의의 원칙'을 만들었다.
<정의의 제1원칙>
모든 사람이 언론과 사상, 종교, 신체의 자유 등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정의의 제2원칙>
사회적·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있을 때는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주어야 하며, 기회를 공평하게 주어야 한다.
정의의 제1원칙은 자유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고, 정의의 제2원칙은 사회적 약자인 소수자를 배려하기 위한 원칙이다. 그리고 제1원칙은 항상 제2원칙에 우선한다.
사회적 소수자란 '기회가 적은 사람'을 말한다. 즉, 사회 권력 면에서 약한 사람이다. 장애인, 다문화 가정, 소수 인종, 동성애자 등을 비롯하여, 여성도 우리 사회에서 능력이 같아도 남성보다 취업이 어렵고 임금이 적은 경향이 있으므로 소수자에 속한다.
존 롤스는 소수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배려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했다. 소수자여서 불평등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이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공평하거나 불공평한 제도가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존 롤스는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정의의 원칙에 걸맞기 때문에 역차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만약 소수자를 먼저 배려하느라 내게 불이익이 생긴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우리가 살면서 소수자를 위한 배려 때문에 본인이 피해를 본고 있다고 생각하며 속상해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람에게는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독일의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무려 600만명의 유대인들을 죽였다.
독일의 루터 교회 목사였던 '마르틴 니묄러'는 반공주의자였다. 니묄러는 1930년대 후반에 히틀러가 집권하자 처음에는 반겼지만 나중에는 히틀러에게 반대하다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니묄러는 1945년이 되어서야 연합군에 의해 풀렸는데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끌고 갔을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치가 점령당한 국가의 사람들을 끌고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독일인이고 점령당한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나를 끌고 가려고 왔을때, 나를 위해 말을 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정한 정의의 원칙이 세워지고 소수자를 보호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또한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정의의 원칙을 세우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도 미남이 아니라서, 키가 작아서, 백인이 아니라 황인종이라서,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서 차별받을 수 있다. 또한 건강하던 사람도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당장 좀 불편하더라도 정의의 원칙을 뚜렷하게 세우고, 그것을 지키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기억하자. 유대인이 부당하게 끌려갈때 침묵한다면, 언젠가 내가 끌려갈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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