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이 아니라 일류 되기
「장자」편에 '나무 닭'의 이야기가 나온다.
투계를 좋아하는 왕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닭을 가지고 닭을 잘 훈련시키기로 유명한 기성자라는 사람을 찾아갔는데, 기성자한테 왕은 자신이 가지고 간 닭을 백전백승의 싸움닭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열흘 후에 왕은 기성자를 찾아가 닭이 잘 훈련되었는지를 묻자 기성자가 말한다.
"아직 덜 되었습니다."
이에 왕이 왜 아직 덜 되었다고 하느냐고 묻자 기성자가 말한다.
"닭이 허세가 심하고 여전히 기세등등합니다. 그래서 아직 부족합니다. 열흘 후에 다시 오십시오"
왕을 돌아갔다가 열흘 만에 와서 다시 묻는다.
"이제는 되었느냐? 이제 백전백승할 수 있는 닭으로 길러졌느냐?"
기성자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닭은 아직도 다른 닭의 울음소리나 다른 닭의 날갯짓하는 소리만 들어도 싸우려고 덤빕니다. 그러니 아직은 안 되겠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 정도라면 투계로서 굉장히 잘 길러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성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왕은 이번에도 그냥 돌아서고, 다시 열흘 후에 찾아와서 묻는다.
"이제 되었느냐"
기성자가 그때서야 이제는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러자 왕이 묻는다.
"무엇을 가지고 지금은 되었다고 하느냐?"
그러자 기성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닭이 울고 날갯짓하는 소리를 내도 꿈적도 안 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그 모습이 나무로 만들어 놓은 닭 같습니다. 이제 덕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다른 닭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기성자가 닭을 이십일 동안이나 훈련시키고도 왕에게 아직 안 되었다고 말한 것은 닭이 자신의 힘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기보다는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행위를 고유한 자신의 내면에서 발동시키지 않고, 상대에 대한 반응으로 자기 행위가 발동된다는 것으로서 종속적 주체로서 움직이고 있어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무 닭은 자기가 자기로만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자기 게임을 하는 사람만이 기존에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을 자신으로 세우지 못하고 자신 이외의 것을 상대로 세워놓는 한, 그 사람은 항상 경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또한 경쟁을 계속하는 한 경쟁 상대와 같은 구조에 갇힐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경쟁하며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공생하며 수준이 같아지는 것이고, 같은 수준에서는 앞선다 해도 겨우 조금 나을 수 있을 뿐이다.
조금 나은 수준이 약간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 때 그것을 1등이라고 하는데, 1등은 상대적으로 누구에 비해 높은 것이지 자기에게서만 발현되는 절대적 높이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반면 '일류'는 절대적 높이를 보여주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합당해지는 칭호인 것이다.
절대적 높이를 가진 자는 외부에 반응하는 것을 자기 업으로 삼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이기려 하지 타인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경쟁 구도 속으로 스스로를 끌고 들어가지 않는다. 경쟁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구도 자체를 지배하거나 장악한다. 그래서 자기가 애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멸함으로써 승리자의 지위를 오래 유지한다.
마치 나무 닭처럼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일등보다는 일류를 꿈꾸는 사람이다. 일등은 판을 지키는 사람이고, 일류는 새판을 짜는 사람이다. 우리가 따라하고 부러워하는 바로 그 단계이다.
짜여진 판 안에서 사는데 만족하는 나라는 전술적 차원에 머무르고, 판을 짜보려고 몸부림치는 나라는 전략적 차원으로 상승할 수 있다. 이 전략적 차원에서라야만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독립과 창의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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