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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문학, 사유

직장인과 직업인

by 나달리 2022. 2. 28.

직장인과 직업인

 

세월호 사건이 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이번에도 또 후진국형 재난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후진국형 재난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는 탄식이 들어 있었고, 부디 세월호 사건을 마지막으로 후진국형 재난이 끊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들 했다.

 

세월호 사건 하루 이틀 후, 지하철 추돌 사고가 있었다. 전형적인 후진국형 인재였다. 판교 공연장 환풍구 붕괴 사고도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안전의식이 작동되지 않은 사고들인 것이다.

 

세월호 이후에 후진국형 재난이 끊이질 않았듯이, 세월호 사건도 그 이전의 큰 사건들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지 못했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1994년에 성수대교 다리 상판이 붕괴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었고, 1995년에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져서 500명 이상이 죽었다. 또한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때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었다. 그야말로 후진국형 재난이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후진국형 재난은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렇다면 후진국형 재난이 끊이질 않는 이유는 뭘까? 말 그대로 우리 사회가 후진국형으로 재난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나라가 아직 후진국형 관리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후진국형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모두 한 목소리로 우리의 안전 불감증을 지적한다. 이러한 안전 불감증이 전형적인 후진국형 증세인 것이다.

 

재난이 일어나고 나서 우리는 그 원인들을 다양하게 분석하는데, 초점은 다음 세가지로 집중된다.

 

안전불감증! 준비소홀! 훈련부족! 

 

안전, 준비, 훈련 이 세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안 지켜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렇게 쉬운 단어들로 되어 있는 세가지가 우리에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긴 시간 동안 노력했으면서도 이 세가지를 해내지 못했다면,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해낼 능력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 아닐까?

 

맞다.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해내지 못했다면,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해낼 능력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솔직한 태도일 것이다.

 

사실 이 세 단어들은 매우 쉽게 이해되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것들이다. 이 세가지는 모두 아직 오지 않은 것들,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일들에 대하여 미리 예비하는 태도들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일들에 대하여 미리 대비하는 태도들인 것이다.

 

그래서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진다. 현상 세계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이지 않은 것과 접촉하는 도전이 시도되지 않는다.

 


 

언젠가 TV에서 난타 공연을 만든 송승환 씨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선진국에서 난타 공연을 할 때면 공연 전에 꼭 한두 사람 앉혀놓고 정식 공연처럼 리허설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한두 사람은 소방서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공연에서 불이 사용되니까 소방서 직원이 공연을 먼저 보고 불 높이가 너무 높은건 아닌지 살핀 후에 불의 높낮이를 결정해준다는 것이다. 정식 공연을 할 때도 소방서 직원이 소화기를 들고 제일 앞좌석에 앉아 있다고 한다.

 

혹시 모를 화재에 이렇게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은 그 사회가 얼마나 고도의 민감성으로 유지되는지를 알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민감성이야말로 독립적 주체로서의 성격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지적인 게으름이 습관화된 사람들에게는 발휘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사실상 안전, 준비, 훈련, 선진, 상상, 창의, 선도, 예술, 철학적시선, 예민함 등등은 모두 같은 높이에 있다. 단어만 다를 뿐이지 이것들의 작동과 실행은 거의 동등한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어떤 회사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안전의식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듣는다면, 그 회사는 반드시 상상력도 부족할 것이다.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듣는 회사가 있다면, 그 회사는 반드시 세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도 함께 부족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일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보통 취직을 한다. 즉 '직'을 갖는다. 그 후로 그 사람은 그 '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그 '직'은 자신의 '직업'이 된다. '직'은 자기가 맡은 역할이고, '업'은 사명 혹은 자아실현을 의미한다. 직업이라는 말의 의미는 자신이 찾은 그 역할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간다는 것이다. 

 

'직'은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직'과 '업'은 일체가 된다. 이때 자신은 자신으로 살아 있다. 그 직업 안에서 자신은 행복하고 충족감을 느낀다. 당연히 민감성과 예민함이 유지된다. 몰입도가 유지되어 창의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러나 이 직과 업이 누구에게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점점 '직'에 익숙해지면서 긴장감이 떨어지다 보니 '업'에 대한 각성이 느슨해지고, 결국 서서히 자신과 '업'이 분리된다. 그래서 자신이 맡은 역할은 그저 생계를 유지하거나 돈을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일을 할 때도 '직'에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나누는 곳에 오히려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막판에는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나누는 것을 편하게 하기 위해  '직장'의 보안까지도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정도의 사람은 그저 '직장인'일뿐이다. '직업인'이 아니다.

 

사회가 낡고 병들면 많은 사람들이 직업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직장인으로만 존재한다. 군인도 영혼이 빠지면 직장인으로 전락한다. 그러면 국방에 대한 민감성이나 예민함도 사라져 경계가 느슨해진다.

 

이렇듯 '직'과 '업'이 분리된 사람들로 채워진 조직에는 부패가 만연하고 생기가 없게 된다. '직'과 '업'이 분리된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는 급격히 쇠퇴한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직'을 '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돈 몇 푼에 영혼을 쉽게 팔지 않는다. 부패하지 않는다. 그리고 몰입할 수 있다. 창의적인 도전을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지금 직장인인가? 아니면 직업인인가? 이것은 결국 내가 나로 존재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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